인물탐구

덕혜옹주 딸 남편 역사왜곡 영화 사진 유학 결혼 일대기 삶

2020. 12. 15.

고종황제의 고명딸로 순종황제, 의친왕, 영친왕에게는 이복동생이 됩니다. 생모는 복령당귀 양춘기입니다. 양씨는 원래 궁녀였던 A, 임금의 은혜를 입고 덕혜옹주를 낳아 후궁이 되었습니다. 양씨 친정 오빠는 백정으로 조선에서 가장 천한 신분이었지만 누이동생 덕분에 관복을 입고 궁궐에 드나드는 귀한 신분으로 출세했습니다.

덕혜는 1921년 이복형인 순종황제가 하사한 작호이지만 그 이전에 이름이 있었다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한국 측 기록에는 오직 '아기', '복녕당 아기', 일본 측 기록에는 '아가씨'로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나중에 대한민국 호적에도 '이덕혜'가 이름으로 기재돼 있었습니다. 덕혜옹주의 삶을 다룬 여러 매체에서도 황녀 이덕혜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덕혜옹주는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대한제국의 황녀는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대한제국(or조선) 마지막 황녀라는 그녀의 제목은 실은 틀린 것입니다. 대한제국에는 황녀가 없었고 조선의 마지막 (정식 봉작을 받은) 공주는 철종의 외동딸 영혜옹주였습니다


출생 - 1912년 5월 25일, 일본령 조선 경성부 덕수궁
사망 - 1989년 4월 21일 (향년 76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창덕궁 낙선재

덕혜옹주(德惠翁主, 1912년 5월 25일 ~ 1989년 4월 21일)는 조선의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고명딸입니다. 황녀로 덕혜라는 호를 내려 이전까지 '복녕당 아가씨'로 불리다가 1962년 '이덕혜'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덕수궁에서 태어났으며 경성 해맞이 공립 심상 소학교 재학 중에 일본의 강제적인 요구로 유학을 명분으로 도쿄로 보내고 일본 황족들이 공부하는 학교인 여자 가쿠슈인에서 수학하였다. 1931년 옛 쓰시마 번주 가문의 당주이자 백작 종 다케시와 정략 결혼을 하고 1932년 딸 우마사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조울증, 우울증 장애, 반복성 우울증 장애와 함께 정신장애인 조현병 증상을 처음 보였고 결혼 후 병세가 악화되었습니다. 1946년부터 마쓰자와 도립 정신 병원에 입원한 후 1955년에 이혼을 했습니다.


대한제국 멸망 이후 출생하였으므로 엄밀하게 황족은 아니었으며, 일본 왕공족의 신분이었어요. 1962년 김을항과 영친왕의 부인 이방자의 협조로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창덕궁 약선재 내 스칸제에서 거주하다가 1989년 뇌졸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시신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부석림에 묻혔습니다.

 

생애, 출생 및 유년 시절

덕혜 옹주는 1912년 5월 25일 일제 강점기의 경기도 경성부 덕수궁에서 고종과 귀인 양 씨 사이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출산과 동시에 궁녀였던 양씨는 복녕이라는 당호를 하사받고 귀인으로 봉해졌으며 덕혜옹주도 복녕당 아목씨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같은 해 7월 13일 고종은 덕혜옹주를 복녕당에서 자신의 거처인 함녕전으로 데려왔습니다. 고종에게는 9남 4녀를 두었는데 3남 1녀만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아 덕혜옹주가 사실상 유일한 딸이 되었습니다.


그는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에 태어났으므로 정확하게는 황족이 아니라 일본 황공족의 신분이었습니다.

 

1916년 4월 1일 고종태 황제는 덕혜옹주를 위해 덕수궁 안에 유치원을 설치하도록 명하고 경구 정자와 장옥식을 보모로 촉탁하였습니다. 유치원은 준명당에 설치되어 덕혜옹주는 귀족가의 딸과 또래 7~8명과 함께 교육을 받았습니다 1917년 6월 왕공족의 신분을 정식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고종은 덕혜옹주가 영친왕 이은처럼 볼모로 일본에 보내지거나 일본인과 정략결혼을 하게 될까봐 시종 김황진의 조카인 김장한과 비밀리에 약혼을 계획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였습니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한 뒤에도 덕수궁에 머물다가 고종의 혼전이 창덕궁으로 옮겨지자 1920년 3월 15일 어머니 양귀인과 함께 창덕궁 내 있는 전각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학창 시절, 경성일출공립심상소학교

1920년 4월 1일부터 궁내심상소학교 1학년 과정을 3명의 학우와 함께 교육받아 1921년 4월 1일 경성에 체류한 일본인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설립된 경성일출공립심상소학교 2학년으로 입학하였습니다. 일출심상소학교에서는 일본복을 입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어 통학할 때는 일본복을 갖추어 입었는데 옹주는 주로 몽츠키와 하카마를 입었습니다. 학교 수업은 일본어로 진행되어 그녀는 유학하기 전에 이미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있었습니다.

1921년 5월 4일 '덕혜'라는 호를 정식으로 하사받아 일본 궁내성에 상신을 거쳐 옹주의 존칭을 이때부터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함께 재학했던 동급생들의 회고록에 따르면 옹주는 왕족다운 기품을 지녔는데, 키가 크고 얼굴이 희며 머리는 가운데를 반으로 나누어 뒤에서 양쪽으로 길게 땋아 얌전히 기르고 일본옷에 하카마를 입고 학교에 다녔다고 합니다.

상궁은 늘 마차를 타고 왔고, 수업시간에 교실 뒤에 서서 망을 보았다고 해요. 당시 옹주의 다른 학우는 "옹주는 공부를 잘했고 특히 습자에 뛰어났다"고 회상하고 있습니다. 옹주는 동요를 만드는 데도 뛰어났는데, 일출심상소학교 재학 중에 읊은 동요는 다음과 같습니다.

 

덕혜옹주의 유학

1925년 정월에 이왕직 차관인 고쿠분 죠타로는 순종에게 덕혜옹주의 일본 유학이 결정되었음을 통고했습니다 같은 해 3월 28일 경성을 출발하여 3월 30일 도쿄에 도착하였고, 4월 14일 여자학습원 중등과 2학년에 입학하였습니다.


1926년 3월 3일 덕혜옹주는 영친왕 부부와 함께 귀국하여 순종을 알현하고 3월 11일 도쿄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순종의 병세가 심각하다는 소식을 듣고 영친왕 부부와 4월 8일 다시 경성으로 돌아왔습니다. 순종은 4월 25일 승하하였고, 덕혜옹주는 순종의 인산에 참석하지 못한 채 5월 10일 도쿄로 돌아갔습니다.1929년 5월 30일 어머니 귀인 양씨가 사망하자 6월 2일 귀국하지만 귀인 양씨가 왕공가궤범에 따라 귀족이 되지 않아 왕공족인 덕혜옹주가 복상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복상을 할 수 없었습니다.


6월 9일에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후 옹주는 1930년 봄경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여 등교를 거부하여 심한 불면증 증세를 겪었고 영친왕저택과 별장에서 요양을 하였으나 결국 9월 정신장애인 통합실조증으로 진단받았습니다. 1931년에 증상이 호전되어 같은 해 3월 27일에 여자 학습원 본과를 졸업했습니다.

 

덕혜옹주의 결혼 생활

덕혜옹주의 결혼 전 일본 황족과 조선귀족 중에서 배우자가 낙점된다는 약혼설이 있었으나 1930년 10월 종무지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종의달의 양자로 들어가 백작의 지위를 계승한 화족으로서의 혼인이 결정될 무렵에는 도쿄제국대학 영문과 3학년에 재학 중이었습니다. 황공족의 혼례는 칙허를 받아야 한다는 『황공가궤범』 제119조에 따라 1931년 4월 14일 덕혜옹주의 결혼을 인정하는 쇼와천황의 칙허를 받았으며, 같은 해 5월 8일 도쿄에서 결혼식이 순일본식으로 거행되었습니다.


옹주의 혼인에 관한 유언비어가 나돌고 그녀의 혼인이 확정되자 옹주의 신하와 옛 친척들은 많은 반대를 표시했습니다. 옹주는 결혼 초부터 거의 완전한 실어증 증세를 보이고 있었고, 그녀의 정신 분열증은 상당히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모습을 보면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 계속 소리내어 실소하는 병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후 옹주는 1932년 8월 14일 소마사에가 태어났습니다.


출산 후, 조현병(정신병)이 한층 더 악화되어, 1946년부터 마츠자와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입원이 장기간 이어지자 증무지는 1955년 영친왕 부부와 협의한 뒤 덕혜옹주와 이혼하였고 덕혜옹주는 호적에 어머니의 성인 양나라와 봉호인 덕혜를 조합한 양덕혜로 일가를 창립하였습니다 이혼 후 증무지는 혼례품 및 덕혜옹주와 딸 마사에의 한복과 생활용품을 돌려주었고, 영친왕 부부는 1956년 이 물품을 일본문화학원의 전신인 문화여자단기대학 학장 도쿠가와 요시치카 전후작에 기증하였습니다. 1947년 10월 신적강하로 평민이 된 후 자금지원이 중단되어 생계와 치료에 어려움이 생기자 덕혜옹주의 입원비는 영친왕이 부담하였습니다. 1956년 8월 26일 딸 마사에가 산에서 자살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었습니다

 

덕혜옹주의 귀국

서울신문 도쿄특파원 등으로 활동하던 김을한 기자는 덕혜옹주의 귀국을 추진하여 1961년 11월 12일 미국을 방문하던 중 일본 도쿄에 들른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와 만나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귀국에 대한 협조를 약속하였습니다. 옹주는 입원한 1946년 이래 15년 가까이 송택병원에서 지내다가 1962년 1월 26일 38년간의 일본생활을 마치고 대한민국으로 영구 귀국하였습니다.

귀국 당일 김포공항에 유치원과 초등학교 동창인 민영아와 당시 72세의 유모 변복동이 마중 나와 창덕궁 낙선재에 들러 순정효황후 윤 씨를 만난 뒤 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 같은 해 2월 8일 '이덕해'로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고, 같은 해 3월 28일 최고회의 상임위원회는 덕해옹에게 생계비를 지급하기 위해 '구황실재산법' 개정 법률안을 통과시켰습니다. 1967년 5월 4일 병세가 안정되어 병원에서 퇴원하여 이후 1968년 가을 창덕궁 낙선재 내의 수강재로 이거하였습니다. 전남편 증무지가 덕혜옹주를 만나기 위해 낙선재를 찾았으나 관계자들에 의해 면담이 거부되었습니다.


1970년 10월 29일 자궁에 생긴 용종 제거 수술을 받기 위해 서울대학교 병원에 입원하였고, 1983년 5월 24일 노환으로 한강성심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1989년 4월 21일 오전 11시 40분경 창덕궁 수강재에서 78세를 일기로 별세하였습니다.


4월 25일에는 수강재에서 전주이씨 대동종약원 주관에서 영결식을 거행하였으며,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부속림에 안장되었습니다.

 

사후

덕혜옹주의 불행한 삶이 알려지면서 1996년 MBC 광복절 특집 드라마 <최후의 황녀 덕혜>에서 남편 증 다케유키가 선정되거나 포악한 인물로 묘사되었고 지참금을 노리고 결혼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증무지의 시집 중 옹주를 대상으로 한 작품에서는 그녀를 '사랑하는 아내'로 묘사했고, 그 저금액 등을 살펴봐도 생활이 곤궁할 정도는 아니어서 실제로는 아내를 고귀한 존재로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한국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그의 생애 동안 한국에 대한 비판이나 나쁜 말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옹주가 사용한 유물은 한국과 일본에도 그리 많은 양은 남아 있지 않지만 유물이 소재한 여러 위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동경문화학원에는 조선 왕가에서 기증받은 옹주의 유물이 남아 있는데, 그녀가 입었던 당의와 그녀의 딸 아혜가 사용한 유아복과 게타 등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중 복식 7점(당의, 홍색 슬랭스커트, 스커트, 송화색 숙고사 반회장 저고리, 진한 핑크 저고리, 풍차바지, 단속장소)이 초전섬유퀼트박물관 관장이 설득 끝에 2015년 6월 24일 대한민국에 반환되어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었습니다. 규슈국립박물관에는 옹주의 남편인 증 다케유키의 가계인 대마도 종가로부터 기증받은 유물이 남아 있으며 옹주가 사용한 식기, 천, 회화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덕혜옹주가 등장한 작품

연극
연극 《덕혜옹주》 (예술의 전당, 1995년 5월 3일 ~ 6월 4일)
공연 《덕혜옹주》 (창작뮤지컬, 2013년)

 

텔레비전 프로그램
8.15 특집드라마 《왕조의 세월》 (KBS1, 1990년 8월 15일) - 이주경 주연
광복절 특집극 《덕혜》 (MBC, 1996년 8월 15일) - 이혜숙 주연

 

도서
평전 《덕혜옹주》 (혼마 야스코 저, 이훈 역, 역사공간, 2008년)
소설 《덕혜옹주》 (권비영 저, 다산책방, 2009년):

 

가요
대중가요 《덕혜옹주》 (남호심, 1963년)

영화
영화 《덕혜옹주》 (2016년, 배우:손예진 (아역:신린아, 김소현))

 

기타
크로스오버 《덕혜옹주》, 허진설,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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